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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조 원 AI 의사의 몰락: 바빌론 헬스는 왜 8억 원에 팔렸나

5조 원 AI 의사의 몰락: 바빌론 헬스는 왜 8억 원에 팔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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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으로 병을 진단하겠다던 5조 원 회사가 사라졌다

혈액 검사도, 병원 방문도 없이 오직 알고리즘만으로 병을 진단하겠다던 회사가 있었다. 이름은 바빌론 헬스(Babylon Health), 스마트폰 앱 하나로 전 세계 사람들의 주치의가 되겠다고 약속한 야심 찬 스타트업이었다. 한때 기업 가치는 42억 달러, 우리 돈으로 5조 원을 넘겼고, 수백만 명이 이 앱에 자신의 건강을 맡겼다. 그러나 이 거대한 회사는 2023년 파산했고, 영국 사업은 단돈 8억 원에 팔려 나갔다. 미래의 의료라던 꿈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 이야기는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장밋빛 약속과 냉혹한 현실 사이의 거리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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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 의사라는 담대한 약속

바빌론 헬스는 2013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됐다. 회사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값싸고 손쉬운 의료 서비스를 주겠다는 대담한 목표를 내걸었다. 그 방법은 스마트폰이었다. 몸이 아플 때 병원에 직접 가는 대신, 앱을 켜고 영상 통화로 의사와 상담하면 됐다.

여기에 인공지능 챗봇이 더해졌다. 증상을 입력하면 챗봇이 몇 가지를 되묻고, 무엇이 문제인지 곧바로 알려 준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이 서비스가 국가 의료 체계와 연결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병원 대기줄에 지친 사람들에게 주머니 속 의사는 그야말로 혁명처럼 다가왔다. 특히 영국의 의료 체계는 진료를 받기까지 며칠, 때로는 몇 주씩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스마트폰만 켜면 몇 분 안에 의사와 연결되는 바빌론의 서비스는, 많은 사람에게 구원처럼 느껴졌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이용자가 빠르게 늘었고, 바빌론은 순식간에 영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헬스케어 기업으로 떠올랐다. 언론은 이 회사를 의료의 미래라고 추켜세웠다.

미래의 의료를 판 사업가, 알리 파르사

이 야심 찬 회사를 세운 사람은 알리 파르사(Ali Parsa)였다. 그는 원래 병원을 운영하고 금융을 다루던 노련한 사업가였다. 이란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건너온 그는 뛰어난 화술과 담대한 비전으로 유명했다. 그는 인공지능이 인간 의사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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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력적인 비전에 세계적인 투자자들이 앞다투어 지갑을 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부펀드 같은 거물들도 큰돈을 보탰다. 파르사는 언론과 정치권 앞에서 미래의 의료를 설파하는 스타가 됐다. 그가 그리는 세상에서는 누구나 주머니 속에 개인 주치의를 두게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 화려한 약속의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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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논란을 부른 AI 진단 주장

바빌론이 가장 큰 논란에 휩싸인 것은 2018년이었다. 회사는 자사의 인공지능이 인간 의사만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이 주장은 곧바로 의료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전문가들은 회사가 근거로 제시한 평가 방식 자체가 신뢰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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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여러 의사가 바빌론의 챗봇을 직접 시험해 본 뒤 우려를 나타냈다. 챗봇이 위험한 증상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엉뚱한 진단을 내놓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료에서 단 한 번의 오진은 곧바로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다. 편리함이라는 이름 아래 안전이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경고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회사는 이러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자사의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홍보에 더욱 열을 올렸다. 검증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성장을 좇는 회사의 방향은 점점 더 어긋나기만 했다. 이 위험한 어긋남은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는 결정적인 약점으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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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사업 모델이라는 함정

바빌론의 몰락에는 기술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어긋난 사업 모델이었다. 영국에서 바빌론은 환자 한 명당 정해진 금액을 국가로부터 받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문제는 이 앱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젊고 건강한 층이었다는 점이다.

원래 이런 계약은 평균적으로 1년에 두세 번 병원을 찾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설계됐다. 그런데 앱이 워낙 편리하다 보니, 이용자들은 예상보다 훨씬 자주, 1년에 예닐곱 번씩 앱을 찾았다. 상담이 늘어날수록 회사는 오히려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파르사 자신도 훗날 이 점을 인정하며, 이용자가 늘수록 돈을 잃었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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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한 상장, 그리고 완전한 재앙

2021년, 바빌론은 미국 증시에 화려하게 상장했다. 이른바 스팩이라 불리는 우회 상장 방식을 통해서였고, 기업 가치는 42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서둘러 증시에 오른 탓에, 상장 직후부터 주가는 끝없이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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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창업자 알리 파르사는 그 상장 결정을 두고 믿기 힘든, 완전한 재앙이었다고 후회했다. 회사를 살리려던 선택이 오히려 회사를 벼랑 끝으로 밀어붙인 셈이었다. 미래의 의료를 자신하던 그 당당함은 참담한 반성으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8억 원, 그리고 남은 것들

2022년 심각한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는 결국 2023년 8월 미국 법인이 파산을 신청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9월, 영국 사업은 단돈 8억 원, 정확히는 약 62만 달러에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42억 달러에서 시작한 회사의 가치가 불과 몇 년 만에 거의 0에 가깝게 증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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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피해는 이 앱을 믿고 사용하던 수백만 명의 이용자들에게 돌아갔다. 자신의 건강 정보를 맡기고 진료를 받던 서비스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면서, 이용자들은 새로운 병원과 주치의를 다시 찾아야 했다. 미래의 의료를 약속하던 회사는 정작 자기 자신의 미래조차 지켜 내지 못했다.

특히 영국에서는 바빌론이 국가 의료 체계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던 만큼, 그 여파가 더욱 컸다. 수많은 환자가 기존의 동네 병원을 떠나 바빌론의 앱으로 옮겨 갔다가, 회사가 무너지면서 다시 돌아갈 곳을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편리함을 좇아 옮겨 간 선택이, 결국 더 큰 불편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이 사건은 개인의 건강처럼 중요한 영역을,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스타트업에 통째로 맡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뼈아프게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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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증언하는 부풀려진 꿈

바빌론이 남긴 숫자는 씁쓸하다. 상장 당시 42억 달러였던 몸값은 파산 뒤 8억 원으로 쪼그라들었고, 창업부터 몰락까지 걸린 시간은 딱 10년이었다. 그사이 수백만 명이 이 앱에 건강을 맡겼다. 화려한 숫자와 초라한 끝의 간극은, 이 꿈이 얼마나 크게 부풀려져 있었는지를 조용히 증언한다. 42억 달러라는 숫자는 결국 실제 가치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만들어 낸 거품이었던 셈이다.

테라노스가 떠오르는 이유

바빌론의 이야기는 또 다른 유명한 실패, 테라노스를 떠올리게 한다. 테라노스는 피 한 방울로 수백 가지 질병을 진단하겠다고 약속했다가, 그 기술이 실제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무너진 회사다. 방식은 달랐지만, 두 회사는 놀랍도록 닮은 구석이 있었다. 검증되지 않은 의료 기술을 마치 완성된 혁명처럼 포장했고, 화려한 언변을 가진 창업자가 거물 투자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이 걸린 문제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다뤘다.

intro

의료는 다른 산업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소프트웨어나 소셜미디어라면 서비스가 조금 불편하거나 오류가 나도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의료에서는 단 한 번의 실수가 곧바로 사람의 생명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의료 기술은 그 어떤 분야보다 엄격한 검증과 규제를 거쳐야 한다. 바빌론이 넘지 못한 벽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빠른 성장과 화려한 홍보에 매달리는 동안, 정작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안전성 검증과 신뢰라는 토대가 부실했던 것이다. 이 토대가 흔들리자, 5조 원짜리 회사는 순식간에 주저앉았다.

생명을 알고리즘에게 맡길 수 있는가

바빌론의 몰락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남긴다. 인공지능은 분명 의료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수많은 회사가 인공지능을 진단 보조나 영상 판독 같은 분야에 활용하며 성과를 내고 있다. 인공지능 자체가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마치 완성된 것처럼 과장하고, 편리함과 성장을 안전보다 앞세운 태도였다. 의료는 그 어떤 분야보다 신중해야 하는 영역이다. 단 한 번의 오진이 곧바로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기술은 의사를 도울 수는 있어도, 아직 사람을 온전히 대신할 수는 없다. 바빌론의 이야기는 미래의 의료를 향한 열망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그리고 그 열망이 안전이라는 토대를 잃었을 때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지를 동시에 보여 준다.

그렇다고 인공지능 의료의 미래 전체를 비관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에도 인공지능은 엑스레이나 시티 같은 영상을 판독해 의사가 놓치기 쉬운 병변을 찾아내거나, 방대한 의학 데이터를 분석해 진단을 보조하는 등 실제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이 의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를 돕는 도구로 자리 잡을 때 가장 큰 힘을 낸다는 점이다. 바빌론이 실패한 이유는 인공지능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기술을 완성된 것처럼 과장하고 그 위에 성급하게 회사의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이다.

결국 바빌론의 몰락이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은 분명하다. 혁신은 필요하지만, 그 혁신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순간에는 반드시 겸손과 신중함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고 부수는 실리콘밸리의 방식이, 의료라는 영역에서는 그대로 통하지 않는다. 화려한 약속보다 중요한 것은 단 한 명의 환자라도 안전하게 지키는 일이다. 그 기본을 잊는 순간, 아무리 거대한 회사라도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바빌론이 남긴 텅 빈 앱은, 그 단순하고도 무거운 진실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당신이라면, 당신의 소중한 생명을 알고리즘에게 온전히 맡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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