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간이 3분으로 줄어든 날
회계사 한 명이 꼬박 12시간을 매달리던 세무 마감이, 어느 날 단 3분 만에 끝났다. 책상 위 서류 더미는 그대로인데, 화면 속 숫자는 이미 전부 정리되어 있었다. 그 회계사는 한참을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봤다. 20년간 쌓아온 자신의 기술이 방금 사라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한 사람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다. 2026년 현재, 전 세계 회계 사무소에서 비슷한 일이 매일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회계사라는 직업은 정말 사라지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라지는 것은 직업 전체가 아니라 직업 안의 특정한 일이었다. 이 글에서는 그 변화를 데이터로 하나씩 짚어본다.

AI는 회계사의 어떤 일을 가져갔나
우리는 흔히 회계사라고 하면 복잡한 판단과 전략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 업무의 상당 부분은 반복 작업이었다. 영수증을 입력하고, 장부를 맞추고, 세무 신고서의 빈칸을 채우는 일이 대표적이다.
이런 작업의 공통점은 정해진 규칙과 구조화된 데이터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이 AI가 가장 잘하는 영역이다. AI는 한 글자의 오차도 없이, 사람보다 수백 배 빠르게 이런 작업을 처리한다. 회계사가 밤을 새우던 일을, AI는 커피 한 잔이 식기 전에 끝낸다.
문제는 이 반복 작업이 단순한 잡무가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것은 신입 회계사가 경력을 쌓던 바로 그 자리였다. 장부를 수없이 맞춰보며 회계의 감각을 익히고, 신고서를 반복해 작성하며 세법의 디테일을 체득하던 훈련의 장이었다. AI가 그 일을 가져가면서, 신입이 성장하던 사다리의 첫 칸이 함께 사라졌다.
흥미로운 점은, AI가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의 경계가 생각보다 뚜렷하다는 것이다. 구조화된 데이터와 명확한 규칙이 있는 영역에서 AI는 압도적이다. 그러나 데이터가 불완전하거나, 여러 이해관계가 충돌하거나, 법과 현실 사이의 회색지대를 판단해야 하는 순간에는 여전히 사람의 경험이 필요하다. 회계라는 직업이 통째로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숫자가 먼저 움직였다
변화는 감정이 아니라 숫자로 드러난다. 2026년 한국의 공인회계사 시험 지원자는 1만 4614명으로, 최근 5년 가운데 가장 적었다. 미래가 불안하다는 인식이 응시생들 사이에 퍼졌기 때문이다. 직업의 장래성에 대한 신호가, 시험장 밖에서 먼저 켜진 셈이다.
국제적인 진단도 비슷하다. 세계경제포럼은 2025년 미래 직업 보고서에서 회계와 부기, 급여 사무직을 향후 5년간 일곱 번째로 빠르게 줄어드는 직업군으로 꼽았다. 반복 실행 중심의 역할이 자동화에 가장 취약하다는 분석이다.
주목할 점은, 이 숫자들이 단순한 경기 침체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기가 나빠 일자리가 준 것이 아니라, 일 자체의 구조가 바뀌면서 사람이 덜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경기가 회복되어도 예전처럼 신입을 대규모로 뽑는 시절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구조의 변화는 경기의 변화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한 회계사의 18개월
이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겪은 사람이 있다. 가명으로 박지원이라 부를, 13년 차 회계사다. 그는 중견 회계법인에서 세무팀을 이끌며 마감 시즌마다 팀원들과 밤을 새웠다.
그런데 법인이 AI 기반 감사 시스템을 도입한 뒤, 풍경이 달라졌다. 신입들이 맡던 장부 대조와 단순 입력이 거의 사라졌고, 자연스럽게 신입 채용도 줄었다. 박지원 씨는 처음엔 안도했다고 말한다. 마감 시즌마다 반복되던 야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 다른 불안이 찾아왔다. 자신이 가르칠 후배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이 일의 다음 세대는 누가 될까. 그는 자신의 자리보다 그 빈자리가 더 무서웠다고 했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기술을 물려주던 구조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4년 만에 벌어진 변화
이 변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그 속도가 분명해진다.
2022년 무렵,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회계 자료를 요약하는 시도가 시작됐다. 2024년에는 세무 신고서 초안을 자동으로 작성하는 도구가 실무에 들어왔다. 2025년이 되자 대형 회계법인은 AI 감사 시스템을 본격 도입했고, 신입 채용 규모를 보수적으로 조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6년 현재, 단순 마감 업무의 자동화는 이미 일상이 되었다.

불과 4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한 사람이 신입에서 중견으로 성장하는 시간보다 짧은 기간에, 직업의 풍경이 통째로 바뀐 것이다.

사라지는가, 옮겨가는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회계사는 정말 통째로 사라질까? 숫자는 의외의 답을 준다.
미국 노동통계국은 2034년까지 회계와 감사 직종이 오히려 5%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매년 약 12만 4200개의 일자리가 새로 열린다는 예측이다. 직업 자체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신호다.
핵심은 이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직업 전체가 아니라, 직업 안의 특정한 일이었다. 단순 반복은 AI가 가져가고, 판단과 자문은 사람에게 남았다. 입력과 대조는 기계의 몫이 되고, 전략과 분쟁 대응은 사람의 몫으로 남은 것이다. 직업은 사라진 게 아니라, 무게중심을 옮겼다.
이 구분은 모든 직업의 미래를 읽는 열쇠이기도 하다. AI 시대의 일자리 변화는 직업 단위가 아니라 과업 단위로 일어난다. 하나의 직업은 수십 개의 작은 과업으로 이루어져 있고, AI는 그중 정형화된 과업부터 하나씩 흡수한다. 따라서 “이 직업이 사라지는가”보다 “이 직업의 어떤 과업이 자동화되는가”가 훨씬 정확한 질문이다. 회계사라는 직업은 그 변화를 가장 먼저,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사례일 뿐이다.

현장의 목소리
그 경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박지원 씨에게 가장 달라진 점을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전엔 숫자를 맞추는 게 일이었는데, 이제는 그 숫자가 무슨 뜻인지 설명하는 게 일이 됐습니다.”
그의 말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었다. 일의 본질이 바뀌었다는 고백에 가까웠다. 예전에는 숫자를 정확히 맞추는 사람이 인정받았다면, 이제는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회사에 어떤 위험과 기회가 숨어 있는지 설명하는 사람이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기계가 답을 척척 내놓는 시대에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오히려 더 귀해졌다. 답은 흔해졌고, 질문이 희귀해진 것이다.
이 변화는 회계사라는 직업의 평가 기준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과거에는 빠르고 정확한 처리 능력이 곧 실력이었다. 그러나 그 처리 능력은 이제 AI가 더 잘한다. 사람에게 남은 평가 기준은 통찰, 신뢰, 그리고 책임이다. 고객이 회계사에게 돈을 지불하는 이유가, 계산에서 판단으로 옮겨간 셈이다.

합격과 취업 사이의 간격
변화를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는 숫자가 있다. 2025년 한국에서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1200명이었다. 그런데 그해 10월까지 실제로 신입 자리를 얻은 사람은 338명에 그쳤다.
합격과 취업 사이의 간격이, 그 어느 때보다 벌어진 것이다. 시험에 붙는 것과 일자리를 얻는 것은 이제 전혀 다른 문제가 되었다. AI 감사 시스템 도입으로 신입이 수행하던 반복 업무가 줄면서, 대형 회계법인의 채용 규모가 보수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숫자는 직업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들어가는 문이 좁아졌다는 신호였다. 회계사가 되는 길 자체가 사라진 게 아니라, 그 문턱이 높아진 것이다.

살아남는 회계사의 네 가지 조건
그렇다면 이 변화 속에서 살아남는 회계사는 어떤 사람일까. 현장의 흐름은 몇 가지 분명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첫째, 단순 계산이 아니라 기업의 의사결정을 돕는 자문 역량을 갖춘 사람이다. 둘째, 인수 합병이나 노무 분쟁처럼 복합적인 판단이 필요한 영역을 다루는 사람이다. 셋째, AI가 만든 결과를 검증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사람이다. 넷째, 숫자를 사람의 언어로 통역해 설명하는 사람이다.
이 네 가지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모두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판단과 신뢰의 영역으로 옮겨간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회계사라는 직업의 미래는, 결국 이 영역을 얼마나 빨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반대로 말하면, 위험한 회계사는 정해져 있다. 입력과 대조, 정형화된 신고서 작성에만 머무는 사람이다. 그 일은 AI가 가장 잘하고, 가장 먼저 가져가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동화 시대의 생존은 더 많은 자격증이 아니라,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판단과 소통의 깊이로 결정된다. 같은 회계사 자격을 가지고도, 어떤 능력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미래가 완전히 갈리는 셈이다.

마치며: 안전한 능력만 남는 시대
AI는 회계사의 반복 업무를 빠르게 가져갔지만, 직업 전체를 없애지는 않았다. 대신 들어가는 문을 좁혔고, 일의 무게중심을 판단과 자문 쪽으로 옮겼다.
한 업계 전문가는 이 변화를 이렇게 압축했다. “AI는 회계사를 없애지 않았습니다. 회계사가 하던 일의 성격을 바꿨을 뿐입니다.” 기술이 직업을 없앤 게 아니라, 직업의 성격을 바꿨다는 통찰이다. 사라진 것은 일의 양이었고, 남은 것은 일의 무게였다.
이 이야기는 회계사만의 것이 아니다. 번역가, 콜센터 상담사, 주니어 개발자까지, 모든 직업이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AI는 각 직업에서 가장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부분을 먼저 가져가고, 판단과 책임이 필요한 핵심만 사람에게 남긴다. 패턴은 놀랍도록 일관적이다.
그래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내 직업이 사라질까”가 아니다. “내 일 중에서 어떤 부분이 가장 먼저 자동화될까, 그리고 나는 어떤 능력으로 그 너머에 설 것인가”이다. 결국 안전한 직업이란 없고, 안전한 능력만 남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일에서는 어떤 부분이 가장 먼저 AI에게 넘어갈 것 같은가. 그리고 어떤 부분은 끝까지 당신의 몫으로 남을 것 같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준비하는 사람이, 변화의 파도 위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